성모승천대성당 (자그레브 대성당) Kaptol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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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 대성당은 가장 기념비적이며, 알프스 동남부 지역의 가장 인상적인 고딕 양식의 성스러운 건물이다. 이 성당의 구조를 보면, 후진後陣, Apse의 날렵한 교차늑골아치와 좁은 창문은 프랑스 건축 패턴(트로아의 무늬)과 많이 닮아 있고, 이후에 더해진 신도석의 디테일은 현대 독일 건축양식의 건물 모양과 일치한다. 반면, 창의적인 모양의 조각상은 체코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크로아티아 북부지역으로 고딕양식의 빠른 전파 및 예술의 국제화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그레브 주교관할권의 중요성과 당시의 자그레브 주교의 지위와 권력을 보여준다. 일찍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 즉 성모승천에 헌정되었다. 헝가리 왕, 성 스테판이 항상 최초의 수호성인으로 언급되지만, 사실 그는 두 번째이다.

아마도 라디슬라우스 왕(King Ladislaus 1040-1095)이 자그레브 주교관할권을 설립한 이 후, 새 성당을 짓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대신, 그는 원래 있었던 건물을 성당으로 선포하였다. 

새 성당의 건축은 그가 죽은 뒤에야 시작되었다. 1217년에 완공되어 앤드류2세(King Andrew II 1205-1235)가 제 5회 십자군 전쟁으로 떠나면서 축성(祝聖)하였다. 1242년 타타르족에 의해 새 성당이 파괴되자 주교 스테판 2세는 성당의 미사를 위해 순교자 성스테판 예배당을 세웠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의 이 건물은 오늘날 대주교좌에 포함되어 있다.

주교 티모테이(Bishop Timotej 1263-1287)는 타타르족의 공격으로 무너졌던 이전의 성당의 잔해 위에 새롭고 기념적인 성당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성당을 헝가리 왕, 성스테판에게 헌정하였다. 그는 성구보관실뿐만 아니라, 중앙 후진과 성당 양쪽의 제단을 만들었다. 성구보관실의 프레스코 벽화(흥미롭게도 이 벽화에는 성퀴리누스가 성도미니크와 성프란시스 사이에 함께 등장한다.)는 주교 아구스틴 카조틱(Bishop Augustin kažotić 1303-1322)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교 에버하르트(Bishop Eberhard 1397 – 1406, 1410 - 1419)는 3개의 성당 신도석을 만든 공을 인정받아 마땅하다. 그 증거로 그의 주교문장(紋章)을 성당의 벽과 기둥에서 볼 수 있다.

주교 오스발드 투즈(Bishop Osvald Thuz 1466-1499)는 전체 건물의 지붕을 완성하였다. 남쪽에 있는 성당 정면의 첨탑이 있는 건물은 이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나,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이 첨탑은 17세기 이전에는 완공되지 못했다. 터키의 위협으로 주교 투즈는 성당을 에워싸는 방어시설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방어시설은 이후 주교관할권의 수장, 오스트로곤 대주교, 토마 바카치 Ostrogon Archbishop Toma Bakač 에 의해 1517년 완공되었다. 그는 성당 입구에 탑을 만들었는데, 이 탑은 그의 이름을 따서 바카치 타워the Bakač Tower라 불린다. 이후 이 탑은 1906년 마지막 성당 재건축 당시에 허물어졌다.

17세기에 성당은 화재로 인해 몇 차례나 훼손되었으나, 그때마다 이뤄진 재건축으로 성당의 내부는 가치 있는 물품으로 채워지며 매번 그 격을 더 높여갔다.  그 중에는 바로크 양식의 목재/대리석 제단과 조각가 미하엘 쿠세 Mihael Cusse 의 연단이 포함된다. (연단은 지금도 중앙 신도석에서 볼 수가 있다.) 성당 내부 장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었다. 주교 알렉산다르 알라고비치(Bishop Aleksandar Alagović 1829-1837)가 성모승천 그림을 얻게 되어 제단과 천정에 설치되었다. 대주교 유라이 하울릭(Archbishop Juraj Haulik 1837-1869)은 그 그림을 제단에서 없애고 (프레그라다에 있는 행정교구의 성당에 팔았다.) 대신 네오고딕 양식의 주제단을 만들었다. 1855년 그는 3개의 건반, 하나의 페달, 그리고 53개의 레지스터를 가진 루트비히스부르크의 발커Walcker 사(社)의 대형 오르간을 구입하였다.

오르간이 설치된 벽장의 건축양식은 네오고딕의 형식을 띠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울릭은 사원의 창문에 색을 입혔고, 현재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글라스 창문이 되었다. 본래 형태의 성당으로 복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자그레브 시는 비엔나의 건축학 교수 프레드리히 슈미트 Friedrich Schmidt 를 초청하였고, 그는 그의 학생이었던 헤르만 볼 Hermann Bolle 과 함께 자그레브를 찾았다. 하지만, 성당은 1880년 대지진으로 처참하게 훼손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헤르만 볼의 설계에 따라 많이 재건축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도 네오고딕 양식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105m 높이의 두 개 벨 타워의 아치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1902년에서야 대성당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후 30년간, 성당의 상당한 부분에서 재건축이 이루어졌다.

볼의 재건축 당시, (경제적인 문제와 비제크와 브라프체 채석장의 접근성을 이유로) 질이 낮은 석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특히 새로운 첨탑과 서쪽의 입구 쪽에서 날씨와 도시의 오염 (스모그나 화학요소들로 인한) 석재의 손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는 정문과 석재 조각상 (랜턴이 있는 첨탑 등)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그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서쪽 첨탑 일부분의 보수는 1938년에 시작되었으나, 공산주의가 권력을 잡게 된 이후로 그 공정이 보류되었다가 1968년, 남쪽의 첨탑을 보수하게 되면서 공사가 다시 재기되었다. 이후, 크로아티아 디아스포라 Croatian Diaspora 의 기부를 통해 훼손된 지붕도 완전히 보수되면서, 구리판으로 교체되었다.

1987년, 대주교 프라뇨 쿠하리츠 Archbishop Franjo Kuharić 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특별 자문 위원회뿐만 아니라, '대성당 복원을 위한 자그레브 대주교 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대성당 복원 감시위원회도 만들어졌고, 과학 및 예술 관련 기관과 당국 관할기관이 복원 실행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건축가와 환경보호활동단체의 감정가, 복원가가 선정되고,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우선순위를 반영하여 단계적으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위원회는 정기간행물 „우리의 대성당“을 발간하여, 작업진행사항을 전하고 있다.